"비혼주의라더니"…'29세 연하女와 동거'에 쏟아진 비난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3-03-11 07:20   수정 2023-04-27 16:31


“비혼주의자라더니 개뿔이. 결국 이 양반도 똑같은 남자구먼.”

1895년 영국 런던의 한 미술관. 그림 앞에 선 관객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빵’ 터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을 그린 화가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비혼주의자’였거든요. 키 큰 미남인데 그림 실력도 천재적. 돈 많고 성격 좋고 사교성 좋은데다 노래까지 잘하니 수많은 여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나는 예술과 결혼했다”며 독신을 고수하던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 쉰 살 넘은 나이에 늦바람 든 걸까요. 나이 차이가 29살이나 나는 하류층 여성과 동거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연예계 사람들을 만나서 “이 아이를 배우로 써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다닌다네요. ‘그냥 모델일 뿐’이라지만, 이 그림을 보세요. 누가 봐도 화가가 모델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뻔히 보이잖아요.

둘이 결혼이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그건 또 화가가 싫다네요. 사람들은 쑥덕거립니다. “하류층 여성이니 데리고 놀다 버리겠다는 심보인가? 여자만 불쌍하게 됐어.” “다 늙어서 주책이야, 정말.” 소문의 주인공은 영국 신고전주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프레데릭 레이턴(1830~1896).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이 화가의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희대의 ‘엄친아’, 딱 하나 없었던 게…

스캔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레이턴의 이미지는 ‘완벽 초인’이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부족한 게 뭐냐”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지요. 그럴 만도 했습니다. 먼저 태생부터가 금수저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러시아 황제(차르)의 의사로 일하며 돈을 많이 벌었고, 아버지도 의사였죠. 레이턴 본인은 키 큰 미남이었습니다. 게다가 인품도 훌륭했고, 사교성도 좋았으며, 술·담배도 안 했고,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각 나라의 언어를 마스터했고, 심지어 피아노도 잘 치고 노래까지 잘했습니다. 그 많은 재능 중에서도 가장 빛났던 게 그림 그리는 실력이었습니다.

전설의 시작은 1855년 여름 영국 런던 왕립예술원에서 열린 전시회였습니다. 전시 첫날 축사를 위해 전시장을 찾은 빅토리아 여왕. 의례적으로 전시작들을 둘러보며 영혼 없이 “너무 좋네요”를 반복하다가, 한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작품은 당시 25세였던 레이턴이 그린 ‘치마부에의 마돈나’였습니다. 여왕은 그 자리에서 거액을 지불하고 이 그림을 구입했습니다. 여왕의 그날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림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안 살 수가 없었다.” 불과 20대 중반에 영국 화가로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겁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최고가 된 레이턴. 질투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미술계와 사교계의 스타가 됩니다. 그림 실력과 특유의 친화력, 겸손한 성품 덕분이었지요. 돈을 많이 번 건 물론이고, 34세였던 1864년에는 왕립예술원의 준회원이 되는 명예도 얻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주피터 올림포스’라고 불렀으니 말 다 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뜻도 있지만, ‘최고의 신에 비교할 만큼 완벽한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남자가 없는 게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배우자(애인)였습니다. 수많은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구애해도 레이턴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가 남성의 몸을 아주 아름답게 표현한다는 사실이 그런 소문을 더욱 부추겼지요.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레이턴이 유일하게 좋아했던 건 여자도 남자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레이턴이 화가가 되는 걸 처음부터 못마땅해해서 아들이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둬도 좀처럼 인정하거나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이턴은 아버지가 인정할 만큼 성공하기 위해 쉴 틈없이 일했고, 자연스레 일에 중독됐지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엔 이렇게 ‘일과 결혼한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레이턴도 그런가 보네, 아깝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레이턴이 독신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게 됐습니다.
뒤늦게 만난 평생의 사랑
그렇게 50대에 접어든 레이턴. 늦은 나이에 ‘평생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1881년 동료 화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가, 모델을 서던 22세의 여성과 눈이 마주친 겁니다. 레이턴은 즉시 그녀를 자신의 그림 모델로 고용합니다. 자기 집 바로 옆에 그녀와 가족이 살 수 있는 집을 얻어주고, ‘도로시 딘’이라는 예명까지 지어 줬습니다. 그리고 둘은 항상 꼭 붙어 다녔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서로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레이턴의 친한 친구들이 편지에서 딘을 레이턴의 ‘아내’라고 지칭한 게 증거입니다. 또 레이턴은 딘이 갖고 있던 배우의 꿈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습니다. 연기 선생님을 붙여 줬고, 공연계 사람들에게 딘을 배우로 써 달라고 부탁했고, 활동비도 내 줬지요.

당연히 언론과 호사가들은 ‘곧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레이턴은 “약혼하지는 않았다”는 말만 반복할 뿐,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그러자 뒷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집안 출신인 레이턴이 딘을 갖고 놀고 있다.” “딘만 불쌍하게 됐다.” “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 데리고 인형 놀이를 하는 것 같다.” 별별 조롱과 악담이 쏟아지는데도 레이턴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레이턴이 딘의 곁을 지키면서도 침묵했던 건 사랑하는 여자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의 전기 작가 엘리앗 네게브와 예후다 코엔은 저서 <플레이밍 딘>에서 침묵의 이유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딘이 하류층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 배우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레이턴의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안 될 일. 지독하게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 기혼 여성이 배우로 일하는 건 쉽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딘이 꿈을 이루는 걸 도우면서도 커리어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레이턴으로서는 이런 식의 처신이 최선이었다는 얘깁니다.

딘은 훗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0살이 넘었지만 레이턴은 내가 아는 가장 젊은 남자다. 그리고 가장 친절하고, 관대한 남자다.”
죽음, 그리고 잊혀지다

60세를 넘어서면서 레이턴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일 중독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출장을 다니고, 그림을 그렸지요. 사는 방법이라고는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지병인 협심증이 도집니다. 그래도 레이턴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론 작품의 주 모델은 딘이었습니다. 작업실에서 딘은 포즈를 취했고 레이턴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몇 달의 시간 동안, 둘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림이 대신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클리티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존재로, 태양의 신 아폴론을 짝사랑해 태양만 애달프게 바라보다 해바라기가 되어버린 님프(요정) 입니다. 인생의 해는 저물어가고, 석양 속 한 줄기 빛이 마지막으로 비치는 지금, “제발 사라지지 말아 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는 클리티에. 삶도, 예술도, 딘과의 사랑도 붙잡고 싶었던 레이턴의 애절한 마음이 그림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이 작품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레이턴은 1896년 세상을 떠납니다. 딘에게는 상속자 중 가장 많은 5000파운드의 유산을 남겼고, 딘의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별도로 5000파운드를 더 남겼습니다. 지금 한국 돈으로 따지면 15억원정도 되는 돈입니다. 하지만 레이턴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딘은 행복한 삶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3년 뒤 병에 걸려 불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거든요. 여기엔 레이턴에 대한 그리움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레이턴이 죽은 후 딘이 두 번 다시 화가의 그림 모델을 서지 않은 게 그 방증입니다.

그리고 레이턴과 딘은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 갑니다. 공교롭게도 레이턴이 사망한 직후 세계 미술계의 유행이 ‘개성적인 그림’으로 확 바뀌었고, 레이턴 식의 ‘잘 그린 그림’은 좋지 못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동안 이런 풍조가 계속되면서 기사 첫 부분에 나온 명작 ‘플레이밍 준’도 한때는 작품값이 액자값보다 저렴해지기도 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좀 생소한 미술관인 중앙아메리카 푸에르토리코의 폰세 미술관이 이 그림을 소장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남의 시선, 뭐가 중요한가
다행히도 1960년대부터 레이턴의 작품세계에 대한 재평가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레이턴은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영국 화가로, 플레이밍 준은 ‘남반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세기의 명작으로 대접받게 됐습니다. 레이턴의 연인이자 배우였던 딘에 대한 관심도 커졌지요. 이에 따라 둘의 사랑 이야기도 재조명받게 됩니다.

생전 둘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나이가 많이 차이 난다는 이유로 온갖 비난과 음해를 받았고요. 억울한 일들을 겪고 여러 손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후회는 없었을 겁니다. 서로 함께였기에 언제나 행복했으니까요.

레이턴의 사랑 이야기와 아름다운 작품들을 기사로 소개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규칙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레이턴처럼 타인의 시각이나 편견을 어느 정도 무시해야 얻을 수 있는 행복도 있습니다.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방향이 옳다고 확신한다면, 용기를 내서 그 길을 계속 가세요. 그렇다면 사랑이 됐든 일이 됐든, 그 길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을 것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i>*기사 내용에 들어 있는 정보는 각 미술관 홈페이지, 엘리앗 네게브와 예후다 코엔이 쓴 책 ‘Flaming Dene :a victorian stunner’에서 참조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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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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